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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환경과 자연의 무서움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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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이 스미(小泉信三) 씨의 따님은 「아버지, 고이오」라는 책에서 고이 스미씨와 그의 아들 신키찌씨 장면을 이렇게 묘사했다.는 양보하지 않고 공을 세게 던진다.오빠는 공을 다 몸을 사리듯 하며 배 언저리에서 공을 받으면 아을 무서워하지마라, 손을 앞으로 내밀어 하고 소리공을 똑바로 보고 받아 하시면서 아버지는 온 힘을 지는 것이었다.

사부(師父)로서 유명한 고이스미씨가 부자간에 볼 광경을 그 따님이 묘사한 모습에서 우리는 아버에게 주는 교훈의 몇 가지를 엿볼 수 있다., 날아오는 볼에 시선을 집중하고 똑바로 보고받게 한다.즉 남자로서 공포에 대해선 눈을 똑바항하라는 인생의 자세인 동시에, 스포츠에 있어서 포구(浦球)의 정확한 폼을 가르치는 교훈이 된다.스포츠에서만이 아니고 삶의 과정에서도 올바르일의 정도(正道)를 익힐 수가 있다.은 위험에 직면하면 눈을 딴 곳으로 돌리고 고개버리게 되는데, 이것은 싸우기 전부터 이미 위기

에 패배한 자세인 것이다.교통사고의 순간, 최후의 핸들을 꺾기 건에 얼굴을 푹 숙이는 약한 인간이기보다는 대담하게 핸들을 꺾음으로써 교통사고의 위기를 극복하는 냉정한 의기와 폼이 몸에 배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가랭이 사이의 급소를 때릴지도 모르는 쇼트번트를 눈을 끝까지 똑 바로 뜨고, 손으로 못 갑을 때에는 가슴을 펴서 군받아 보려고 하는 그런 일종의 적극적인 자세를 가르쳐야 로 하는 것이다.그러한 정확한 품을 가르침때는 눈을 바로 뜨게하라' 으로써 아버지들은 아이들에게 인생의 난구()를 처리할 수 있는 자세를 가르쳐 주지 않으면 안 된다.

걷는 것의 중요성을 가르쳐라

아이들은 게을러져서 아이들의 권리이고 의무인 걷는

게으름을 피우게 되었다.도대체 아이들이 걷지 않게 육체적으로 자라날 수 있단 말인가? 아이들이 걷가치는 육체적인 단련 외에 자신의 발바닥으로 이을 몸에 익히는 데 있다.

교통이 발달하더라도 인간은 갑자기 예기치 않은들어 제 발로 걷고 또 걸지 않으면 스스로를 구하는 경우가 있다.그때 걷는 힘도 그렇거니와 자신거리 감을 스스로 확인하는 본능을 잃어버렸다면 인진의 존재까지 허망하게 잃게 되지 않는다고 그 누구할 수 없는 것이다.그렇고 요즈음의 부모들은 아이들을 걷지 않게 함으모로서의 허영심을 만족시키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집은 높직한 언덕 위에 있으며 버스 편이 없어서 아기웃 동급생 아버지의 차에 편승하는데, 하교 할 때더 걸어서 오게 하고 있다.자동차 타는 습관이 아주 몸에 배어 비가 오면 택아타고 돌아오는 일이 있다.차가 없을 때는 낯익은부탁해서 차를 얻어 돌아은다.

최근에는 그것을 엄중하게 금하고 있으며 그래도 아이들이 차를 탈 때는 택시 요금을 아이들 용돈에서 물도록 하고 있

.그래도 아이들은 이러쿵 저러쿵 이유를 붙여 택시 요금을 타내려고 한다.

요즘 아이들과 나의 유년시절이나 소년시절을 비교하여 보고 너무나 차이가 크다.

과거에는 만사가 불편했고 아이들도 무거운 짐을 들고 상당히 먼 거리를 걸었던 기억이 난다.그리고 그 추억에는 괴로움뿐만 아니라 어떤 그리움이 있다.

나는 대학시절 봄방학에 돈은 떨어지고 시간은 남고 하여 친한 친구와 단 둘이서 토오코오에서 오오사카(大阪) 까지 걸어서 간 일이 있다.처음에는 고무화로, 나중에는 맨발로 걷다가 그 무렵 아직 길가에서 팔고 있던 짚신이 보행에 가장 적당하다는 것을 우연히 발견하고 교신을 신고 걸었다.도중에 지나치는 차가 부탁도 않는데도 호기심으로 우리를 태워주어 편승도 하면서 오오사카에는 20일도 안되어 도착할 수 있었다.

그때에는 아무 목적도 없이 걷는 것이 참 즐거웠다.세상의 다른 걸음걸이와 달리 차를 타지 않고 한 발 한 발 그저한가하게 자기의 존재와 자기가 살아가고 있는 시간을 인식하게 하여 주어 지금은 감미로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나는 아마 아이들이 고교생이나 대학생이 되었을 때엔 지금보다도 더 발달한 교통기관의 편리에 반역케 하여 아이들에게 어느 목적지를 지정하고 대 상금 (代償金)을 지블하더라도 제발로 걸어 가는 아르바이트를 주리라 마음먹고 있다.

산과 바다의 무서움을 가르쳐라

우리의 일상생활이 점차 기계화되고 물질화되어 인간이 자연에서 멀어져 가고 있기는 하지만 인간은 언제 어느 때 자연의 무서움에 마주치게 될지 모른다.그리고 자연의 힘의 법칙을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그 법칙에 따라 자연에 비하면 사소하고, 도모하는 바가 천박하다고 할 수 있는 인간의 삶을 살아갈 수가 있을 것이다.

칸트는 그의 순수 이성 비판』중에서 인간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의 실재를 감득() 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다시 말하면 산이나 바다를 바라보는 것으로 신비, 영원, 신성(神性)을 감득할 수 있다고 말했다.요즈음의 인간생활 속에서는 느낄 수 없는 그러한 숭고한 감정을 우리는 자연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그리고 그것은 도시의 혼잡한 생활 속에서 대단치 않게 생각했던 자신의 인생에 실은 자신도 알지 못했던 깊이가 있고 넓이가 있다는 사실을 암시 받을 것이 틀릴 없다.

나는 연조가 깊은 요트 승조원 (乘組員) 이지만 이제까지 바다 위에서 수없이 무서운 꼴을 당하고 자연의 광폭함을 맛보았다.지난날 두 척의 배와 한 사람의 생명을 잃은 요트레이스에서 나는 정장(延長)으로서의 판단에서 눈앞에 놓인 승리

산과 바다의 무서움을 가르쳐라

고집하지 않고 레이스를 기권합으로써 여러 요트 중 오직리 배만 무사했다.다음날 다른 배의 조난 소식을 들었을 내가 그 거친 바다에서 내린 판단을 그대로 인생에 적용 수 있다는 자신(自信)을 얻었다.나는 그때 아직 어렸던 장남을 그 배에 데리고 갔더라면 등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앞으로도 많이 있을 항해나 시합에는 아들을 동반하여 바람의 움직임을 읽는 법, 조수 물을 보는 법을 가르치는 것으로 아이들에게 인생의 너브케이션을 가르치겠다고 생각하고 있다.또 우리는 일부러 산이나 바다에 가지 않더라도 하늘을 달리는 유성에 대하여 부모가 말하는 한마디 속에서도 무한한 인생의 폭이나 신비감을 가르칠 수가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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