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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방목은 질서를 가르친 이후, 알려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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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두 형제이면서도 형이 아우를 찔러 죽인 코오토(京都) 대학생과 와세다(早稻田) 대학생의 무서운 사건이 있었다.그 가정은 아이들을 어떻게 키웠는지는 알 수 없으나 형제 간이란 인생에 있어서 타인과의 경쟁의 시작이기도 하다.

나도 단 두 형제였지만 국민학교 때 아우가 나보다 성적이 약간 낮다는 것을 가지고 부모님이 너무 과장하여 아우에게 알렸기 때문에 아우는 나 이상으로 훨씬 우수한 부분을 지니

고 있으면서도, 형인 내 입을 통해서 이런 말 하는 것은 좀우습지만, 단 두 살 차이인 나에 대해서 일종의 열등감을 가

지게 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그것이 그를 분발시켜서 아우는 나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사업면에서의 성공을 거두고 있는중에 있고, 또 아버지가 과장된 언행으로 구분한 형제의 순서를 이제는 둘이서 웃을 만한 여유가 생겼으므로 다행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형제의 순서를 분명하게 세우는 일은 필요하기는 하나 그 정도를 잡기가 어렵다.

여하간에 형제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어려서 형제의순서를 분명히 하는 것은 필요하다.그러나 그 순서가 뒷날형제들이 대등한 사회인으로 자랐을 때 어떠한 그리움을 가지고 돌아보게 되며, 신분이 어떻게 변하는 형은 형으로서아우를 생각해 주고, 아우는 아우로서 형의 체면을 세워 주는 형태로 익어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나는 어려서부터필요 이상으로 장남 의식을 심어 주었기 때문인지 아버지가일찍 세상을 떠났을 때는 아직 고교 2학년으로 능력도 없는데 장남으로서 어머니와 아우를 부양할 의무감에 몰리게 되었다.

그 결과 지망한 문학부를 포기하고 당시 가장 수입면에서좋았던 공인회계사 (公認會計士)가 되기 위해서 지망학교를히 도쓰바시 (一橋) 대학으로 변경하게 되었다.결과적으로는내가 글을 쓰고 정치를 하는 데는 히도쓰바시에서 사회과학을 선택한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이었는지 모른다는 부록까지 붙었다.

자유방임은 질서를 가르친 다음에 허용하라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아이들의 야성(野性)을 키워 준다고 하면서 아이들 교육에 완전히 방임주의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그 집 아이들은 남의 집에 가서도 순서도 분별하지 못하고 가져오는 식사에 자기 마음대로 손을 대고 예의도 범절도 말이 아니다.

그 아이들을 맞이한 상대방 가족들이 난처한 기색을 보이면 당자의 아버지는 상관없어요, 방임주의인데 뭐.」하고 큰소리를 한다는 것이다.아무래도 이런 교육방법은 난폭하다.기보다 지나치게 소홀하다는 느낌을 금할 수 없다.

아이들이란 어떤 의미에서는 본능적이기 때문에 짐승과 같은 것이다.그 본능을 제멋대로 키우는 것은 장차 사회인으로서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아이들에게는 커다란 마이너스가 된다.

근대 미식 축구에서는 풀백이 아무리 전선 (前線)으로 나가거나, 포워드가 아무리 후퇴하거나 괜찮은 것으로 되어 있다.하지만 아직 최소한도의 틀은 적용되고 있다.그 한도에서 플레이어가 아무리 대담한 플레이를 하더라도 허용되지만 볼에 손을 대는 것만은 금지되어 있다.볼에 손을 대던 축구는 이미 축구가 아닌 것이다.

그와 마찬가기로 아이들의 자유방임에도 어른으로서 받아드릴 수 없는 거킬음, 난독함을 아이들에게 허용한다면 아이들일 이미 인간의 자식들이 아니고 김 승새끼들이나 다름없이

그러나 동시에 기본적인 룰 이외에 어른이 만든 수많은 룰은 사실은 무의미한 것에 가까우며 그것들은 깨뜨려지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도 아이들에게 가르쳐주어 야한다.

이 양자의 균형은 대단히 어려운 것으로 이 절충이 교묘하게 이루어길 때 축구가 가장 자극적인 스포츠인 것과 같이아이들의 생활은 가장 충실하게 되고, 아이들 자신으로서도활력과 흥미가 넘치는 생활이 월 것이 틀림없다.

다시 말하면 기본적인 들은 교통법규와 같은 것이다.누구나 빨리 가고 싶고, 급한 때는 빨간 불이 켜져도 달려가고싶지만 거기에는 위협이 따른다.결국 그 룰을 지킴으로써그 인간 자신이 인간으로서의 생존을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아무리 자녀 교육에 자유방임적인 태도를 갖는 부모도 자식보고 빨간 신호인 때도 길을 건너 가라고는 하지 않을 것이다.마찬가지로 고우 스롭의 신호와 근본적으로 같은 기본적룰이 유형 무형으로 인간의 생활 속에 있다.

그 기본적인 룰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즉 세상에는 상대가 있다는 사실이다.빨간 신호의 경우에는 자기 보다도 더강력한 자동차라는 상대가 있어 충돌하면 파멸한다는 사실이다.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생활을 규제하는 룰이 더욱 불어 가지만 룰 때문에 아이들의 심신 발달이 눌려서는 안된다.다만자유방임 속에서 기본적인 룰을 지키는 절도(節度)만은 입이닳도록 아이들에게 가르치지 않으면 안된다.

버릇은 학교에서는 못 가르친다

교육에 지나친 관심을 보이며 거센 치맛바람이 불고, 그만 사실은 모든 것을 온통 학교에 맡겨 버리고 학르치는 교육 내용이 무엇인가는 불문에 붙이고 이 몇 점을 맞고 몇 등을 하였느냐 하는 것에만 관다.운 예로 요즘의 어른들은 젊은이들이 애국심이 없면서도 자기들의 자식을 맡기고 있는 국민학교나

역사교육이 얼마나 절름발이 교육인 계급사관 (階의하고 있는가를 아무도 규탄하려 들지 않는다, 버릇 가르치기 또한 마찬가지여서, 본래는 가정할 예의 범절까지도 학교 선생에게 쓸어 맡겨 버모르네 하고 있다.학교 선생으로서는 대단히 귀찮되지 않을 수 없다.선생은 몇 십명의 아이들을 고 있는 셈이 되어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고는 하그 마음껏 아이들의 개성에 맞도록 교육할 도리가

성을 그다지 중시하지 않는 사회주의 사회라면

이 개성과 능력에 따라서 일할 수 있는 자유를 유주의 사회에 있어서는 아이들이 운명적 숙명적으로 짚어진 능력을 줄이거나 늘이거나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요사이 세상에는 부모로서 자식에 대하여 져야 할 가장 중요한 예의범 걸을 가르치는 의무를 거의 남에게 맡겨 버린 채 방치하고 있다.자식에게 잠자리를 마련해 주고, 먹이고, 어느 정도의 사치를 시킨다고 하는 것은 부모의 입장에서 볼때는 이의적(二義的)인 의무에 지나지 않는다.그런 것은 부모가 아니라도 탁아소 같은 곳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비록 부모가 자식을 충분히 먹일 수 없다 하더라도 그러한 가난과 부자유 속에서 부모는 다른 사람이 가르칠 수 없는 예의범절의 교육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부모가 가장 가까운 인간으로서 자기의 피를 나누어 준 상대인 아이들에게 기대를 걸고 소망을 의탁한다면 부모는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애에게 주지 않으면 안 된다.그것은 우선 첫째, 아이들의 개성을 발견한 다음에 버릇을 가르치는 일 외에는 다른 것이 아닐 것이다.

아이들의 교육에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다.그리고 그 방법 중에서 부모만이 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아이들을 때려주는 일이다.요즘 학교 선생은 이유가 어찌되었든 아이들을 때리면 반드시 말썽이 일어난다.그래서 선생들은 위축되어 감히 아이들을 때리지 못한다.또는 아이들에게 밥을 주지 않고 굶겨서 징계하는 방법도 부모만이 할 수 있다.그리고 아이들을 가두거나 협박하는 것도 부모밖에 할 수 없다.그런 의미에서 부모는 아이들의 교육에 관해 결정적인 비법을 가지고 있는 가장 중요한 교사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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