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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보다는 사용을 가르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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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드레 지드의 땅의 양식 속에 인간의 정열에 대하여 쓴 아름다운 한 귀걸이 있다.「나타니엘, 너에게 정열이 뭔가를 가르쳐 주지.나는 죽을 때 완전히 만족하고 죽거나 완전히 걸 망하고 죽고싶구나 하고, 이것은 요컨데 자기의 자아를 관걸 아는 일이다.위인과 성공자의 합체 (合體)로써 인생을 보낼 수 있느냐, 혹은 아무 성공도 얻지 못하고 사회적인 인간으로서 걸망하며 죽느냐 하는 것이다.어느 편이 되었든 그것이야말로 인간적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요즘 아이들은 아직도 나이가 먼 주제에 「장래의 희망은, 하고 물으면 평범한 샐러리맨]하고 예사로 대답한다.이런 평범을 미덕이라 가르치는 가정교육은 어딘가 석연찮다.

소유물이 아니라 사용물임을 르쳐라.

한한 일이 아니지만 사람의 신분을 그가 갖고 있평가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짓은 없다.물건으로 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적인 페티시즘인데, 이것만적이고 미개한 본능 중의 하나이다.상으로 현대의 우리 생활 속에서 이러한 페티시고 있다.그 예를 하나 들자면 자가용이 되겠는 민사회에서는 자가용을 가졌다는 것은 신분의 상치장의 장식품이 된다는 웃기는 현상을 여기저기 있다.유하는 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목적이 있는 것이다.사용하지 않고 모셔 놓는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자가용이건 보석이건 그것을 신분의 상징으로 가지고 있는 한 그것은 길以는 쓰레기와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지는 어머니에게 옷은 해 주지만 보석은 절대로 겠다고 말씀하셨다.물론 그것은 샐러리맨인 자기하신 큰소리 였는지는 모르겠으나 나의 어이에 공감했고, 지금에 와서 나의 아내나 어머니 취미를 갖는 것에는 역시 반대이다.

간단한 이야기로 다이아몬드가 사방에 떨어져 있다면 다이아몬드 같은 것은 하나도 가치가 없는 것으로서, 희소성이 란 것이 필요성에 상관없이 가치를 갖는 것은 인간 사회가 아직도 미개한 증거라고 아니할 수 없다.디포의 『로빈슨 표류기 속에서도 무인도에서는 사용할 수 있는 양()이 외에는 가치가 없었다.먹고 남은 많은 고기는 야수에게 줄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이것은 디포가 우리 주위에 있는 아무리 훌륭한 것이라도 그것을 사용하지 않으면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위험한 줄 알면서 리어 윈도우에 레이스의 커튼을 달거나, 「냉방 완비 차라는 레이블을 붙이거나, 혹은 새 차의 시이트에 일부러 커버를 씌우는 우리네 차에 대한 취미는 소유가 무엇인지의 진정한 뜻을 아직 이해하지 못한 처사라고 아니할 수 없다.마치 미개한 토인이 쓰잘데 없는 것으로 너줄너줄 자기 몸을 장식하여 자기의 재산목록을 남에게 내보이는 것과 같은 짓이 아니겠는가 ?

예컨대, 우리에게 차는 밤바를 번쩍번쩍 닦아놓은 하나의 액세서리이지만 서구인에게는 좁은 주차장에 주차할 때 빈차를 밀거나 큰 사고를 방지하는 프로텍터에 지나지 않는다.우리는 주차할 때 밤바가 스치기만 해도 화를 내지만 이런 희극은 아마 이 땅에서만 볼 수 있을 것이다.

자동차뿐 아니라 모든 소유물은 그것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는데 비로소 그 의미가 있는 것이라는 점을 아이들에게 알려주지 않으면 안된다.분수에 맞지도 않게 부모는 부모의 차가 있고, 아들은 아들의 차가 있는 집안의 우스운 꼴을 외국인은 어떻게 볼 것인가.

절하는 법을 가르치지 말라

우리 나라의 부모들은 흔히 손님이 오면 자기 아이들에게 인사를 드리라고 시킨다.아이들은 내키지 않은 채「안녕하십니까 하고 인사한다.나 역시 간혹 아이들에게 이러한 절을 강요하였지만 생각해 보면 그러한 강요로 부모는 아이들의 개성을 억압하고 있는 셈이 된다.나는 아이들이 알지 못 사람 앞에 버티고 서서 흘끔흘끔 쳐다보는 것을 좋아한다.아이들은 호기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본능적으로 이 인간은 어떠한 인간일까, 수상한 사람은 아닌가, 자기 나부모가 환영할 수 있는가 어떤가를 판단하려고 든다.나 자신도 처음보는 사람을 아이들처럼 무례하게 쳐다보고 싶지만 세속적인 재간이 방해를 하여 그렇게 못한다.

걸이라는 것은 예의의 한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그리고 또 예의라는 것은 사회의 한 약속에 지나지 않는다.그런 내용도 모르는 아이들에게 자기가 사회의 교제 상 필요하다고 하여 세상의 관습을 불쑥 강요하는 것도 환영할 일이 못된다.그보다는 차라리 아이들의 호기심을 충분히 받아들여서 절을 하기 건에 부모의 손님을 충분히 관찰하게 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걸을 하고 난 다음에는 어른 대 아이라는, 어떤 의미에서는 비굴한 심리관계를 상대방에게 갖고 마는 것이다.

아이들이란 항상 여러 가지 형태로 어른을 당하지 못하는 열등감을 가지고 있는데, 이러한 열등감을 갑자기 알지도 못하는 상대방에게 절을 하게 함으로써 더 조장시킬 필요는 걸대로 없다.

최근 신문에서 어느 국민학교 선생이 체육시간이 끝나고 옷을 입으라고 하거나 손을 씻게 하면 그걸 마친 뒤에 반드시 선생님 이렇게 입으면 됐습니까? 하고 물어오는 아이가 있다고 말했다.어린이가 그런 일을 남에게 묻는 것은 그의 매너가 결코 자기 자신의 것이 아니고, 단순한 체면이고 타인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다.이러한 겉치장은 결국 가정에서 부모가 시키고 있는 것이다.

예의바른 아이, 절 잘하는 아이는 결코 그 아이가 질이 높은 것도 아니고, 다만 외형을 갖추고 있는 것뿐이다.그것이 아이들의 인생의 재산이 될지 어떨지는 의심스러운 일이다.

나는 유치원때 서부터 집과 학교에서 윗사람들에게는 한결같이 걸을 해야 한다는 것을 예절로써 배워 왔기 때문에 중학교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도 상대가 아무리 시시한 선생 일지라도 선생이란 이름이 붙은 사람에게는 머리를 숙이는 습관이 붙어 버렸다.그러나 자아가 싹트기 시작한 16-7세 때에 그러한 나 자신에게 불쾌한 생각이 들었고, 이내 절이라는 것 자체에 반항적이 되었다.마침내 대학시절에는 존경할 수 있는 선생 이외에는 결코 인사를 하지 않았다.그것이 과연 잘 한 일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부모가 강요하는 예의는 반드시 어떤 시점에서 아이들의 반발을 낳게 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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