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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사랑하는 아이로 키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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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한창 왕성하고 활동적으로 뻗어나가는 아이들에게 부모가 관념적으로만 평화를 논함으로써 도대체 무엇을 아이들에게 안겨줄 수 있다는 것일까? 앞에서도 말했지만 부당하게 자기에게 침을 뱉는 상대에게 폭력으로 보복할 수 없는 것처럼 국가와 국가와의 관계에도 이러한 사건이 수없이 일어 난다.오늘날 강대국의 횡포 같은 것도 언제 형태를 바꿔서 우리에게 폭력으로 감행되지 않는다고 누가 단언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점에서도 우리는 아이들에게 전쟁의 본질을 가르쳐 줄으로써 국가 사회 민족에 대한 정당한 방위관을 길러 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전쟁도 개인의 존엄, 민족의 존엄에 비추어 정당성이 있는 전쟁과 없는 전쟁이 있다는 사실을 가르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제 2차대전의 체험으로 우리들 중에는 전쟁이라고만 하면 어떠한 건쟁이든 반대이고, 비록 민족적 국가적인 굴욕을 받더라도 전쟁은 싫다고 하는 사고방식이 있다.이러한 생각은 결국 국가, 사회, 민족을 쇠퇴하게 하고 동시에 인간 개인까지도 위축하게 만드는 것에 불과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가장 경멸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 줘라

인간의 감정 중에서 경멸은 가장 직감적이고 강한 감정이다.존경이나 호감을 플러스라고 한다면 혐오와 경멸은 마이너스의 감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타인의 감정 중에서 마이너스의 감정을 가장 민감하게 받아들이기 쉽다.누가 누구를 존경하고 있는 것보다는 경멸하고 있는 편이 제3자에게 전해지기 쉽다.호감이나 혐오는 다분히 본인의 개성, 심정에 의한 것이지만, 존경이나 경멸은 그 인간의 명확한 인생관, 가치관이란 것에 뒷받침되어 있다.

상대가 아무리 높은 지위에 있는 인간이거나 학식이 있는 인간이거나 그 사람됨으로 볼때 아무래도 경멸하지 아니할 수 없는 인간이 있는 법이다.부모가 누군가에 대하여 그런 감정을 가지면 아이들은 곁에 있으면서 가장 강하게 그 사실을 느끼게 된다.

누구를 좋아하고, 누구를 존경하고 있는 것보다 누구를 경멸한다는 것을 아이들에게 나타내 보임으로써 부모는 자기 인생관, 가치관을 아이들에게 가장 간단명료하게 전할 수가 있다.예를 들면 고이스미(小信三)씨는 「사람의 뒷공론에 대하

여 남의 험담을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무리한 주문이지만, 그 험담하는 방법이 문제다.그런 더런 놈은 세상에도 없다.나는 그가 질색이다)하는 식의 분명한 험담은 듣기에 거북할 것도 없으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사람들이 그를 이렇게 말합니다)하는 종류의 험담은 듣고나면 창문을 열어 방안 공기를 갈고 싶어진다고 말했다.그리고 만일 어떤 사람이 부모의 감화로 남의 험담을 하지 않게 된다면 그것은 평생의 덕()이 될거라고도 말하고 있다.

이렇게 사소한 것처럼 보이는 같은 험담도 그것을 분류하여 그 중 한 쪽을 봉쇄함으로써 부모는 자기의 경멸 대상을 분명하게 드러내어 아이들에게 인생의 걸어 갈 길을 가르쳐줄 수 있는 것이다.

비록 상대가 자기에게 강한 영향력을 주는 사람이고 자기가 그의 비호 (斑護)를 어떠한 형태로든지 받고 있는 경우에도 역시 인간은 상대를 경멸하는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가 있다.이런 때 어떠한 굴욕적인 일을 겪더라도 인간은 경멸로서 그 상대를 능가할 수 있다.

인간이 어떤 상황에 놓이거나 경멸이야 말로 자기를 보존하는 가장 강한 감정이라는 사실을 가르치는 것은 아이들에게 인생에 대한 하나의 교본(敎本)을 주는 셈이 된다.

거기까지는 못 가나 일상생활 속에서 부모가 남이야 그에 대해 뭐라고 하든 자기는 하나의 관점에서 그 인간을 멸시하기 많을 수 없다는 평가를 아이들 앞에서 해야한다.그러면 아이들도 인생을 조심스럽게 살면서도 실은 가슴을 펴고 사는 태도를 가르쳐주는 셈이 된다.적어도 나는 우리 아이들이 어떤 친구를 매우 경멸하고 있을 경우, 그것이 자기의 약검을 감추기 위한 것이라면 꾸짖어 주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미소를 띠면서 그의 주장에 귀를 기울여 주고 있다.

위인과 성공한 사람의 차이를 가르쳐라

이런 일화가 있다.베에토벤과 괴테가 팔짱을 끼고 길을 걷고 있자니까 저쪽에서 국왕이 걸어오고 있었다.괴태는 길을 비켰지만 베에토벤은 모자를 푹 눌러 쓴 채 그냥 옆을 지나쳐 가버렸다.그리하여 그는 국왕은 훈장을 수여할 수는 있어도 천재를 만들 수는 없다는 진리를 인정하게 했다.

이때 괴테가 맡은 역은 괴테 자신으로서는 본의가 아니었을 것이다.하지만 이 일화는 위인이란 어느 정도 천재이며,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강인한 개성을 지닌 일종의 자아광(自安江)이라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성공한 사람 역시 남보다 뛰어나게 우수한 개성이 없으면 성긍할 수 없다고 한다.그러나 위인이라고 추앙받을 만한 인가처럼 강인한 개성, 그 개성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나의 동급생 중에는 어느 큰 회사에서 젊은 나이로 크게 출세한 사나이가 있다.그러나 그의 동료가 비웃으며 하는 말에 의하면 그의 출세비결은 사장이 무슨 말을 하든 「예 사간님, 옳으신 말씀입니다]하고 맞장구를 치는 것뿐이라고 한다.그것이 몰개성 (沒個性) 이라고 한다면, 그만큼 철저하게 몰개성한 것 사제도 하나의 개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

길을 비켜 준 괴테는 아니지만 세상에서는 흔히 자기를 양보함으로써 성공하고, 길을 양보하지 않고 자기의 개성을 밀고 나감으로써 소외 자가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위인은 자아(自我)를 관철하고, 비록 사회에서 소외되더라도 고고 高) 한 인생을 보내고 그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자기 만족 속에서 행하는 인간이라고 한다면, 성공자는 보통 이상의 개성을 지녔지만 타협점에서 타협하고, 자아를 꺾어 가면서라도 사회적인 성공을 획득한 인간이 되는 셈이다.

바람직한 일은 자기 자아, 개성이라는 것을 겪는 일이 없이 사회적으로 큰 일을 하는 것이라고 하겠다.그러나 그와 같이 복받는 위인과 성공자를 겸한 인간이란 드문 것이다.결국 우리는 자기의 개성 · 자아에 충실하게 사느냐, 그렇잖으면 타협하느냐, 듣기 좋은 말로 타인과의 협조에 의하여 자기의 개성을 할애하면서 일을 진행하느냐, 양자 택일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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