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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난감이 아이의 상상력을 망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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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그들 나름의 놀이를 생각해 내기 마련이므로 결코 권태를 느끼는 법이 없다.선진국의 대도시에서건 미개한 벽지에서건 아이들은 놀이에 부족을 느끼는 일이 없다.

예건에는 아이들에게 놀이감을 주는 일이 거의 없었다.그래서 그 아이들은 무()에서 유()를 낳는 것처럼 여러 가지로 그들 자신의 유회를 생각해 내는 것이었다.생각컨데 이 세상에 아이 들만큼 무에서 유를는 일에 탁월한 자가 또 있

어른이 주는 장난감, 어른이가르쳐 주는 놀이는 아이들의창조력, 행동력의 분방성(奔放분에 브레이크를 거는 셈이된다.예를 들면 사방치기, 숨박곡질, 혹은 실뜨기 같은 세계 각국 공통의 가장 소박하면서도 실은 변화가 풍부한 놀이를 최초에 생각해낸 사람은 아이들 말고 도대체 누가 있단말일까? 거기에는 어른이 생각해 낼 수 없는 드릴이 있고기대가 있고 불안이 있다.

최근 잇달아 만들어 내는 손이 많이 간 정교한 장난감을보면 그것이 아이들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아이들보다 창조력이 못한 어른을 위한 것이아닌가 싶어진다.

아이들의 놀이를 위해 부모가 줄 수 있는 단 한가지 것은시간과 공간뿐이다.

놀이를 제공하지 말라

취침을 강요하지 말라

칸트는 일생 동안 자기가 살고 있는 케니히스베르크의 주의 수십 마일 밖을 나간 일이 없었다고 한다.그만큼 그곳사람들은 이 대철학자를 자기 친척처럼 잘 알고 있었다.칸트가 생각에 열중하게 되면 멈추어 선 가게 앞에서 자기도 모르게 가게 물건을 집어 가지고 돌아와 자기 서재에 들어가 앉아서야 비로서 그것을 발견하고 놀랐다고 한다.

한번은 칸트는 앵무새가 들어 있는 서장을 들고 돌아왔다고 하는데, 거리의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도 결코 훔친 것으로 생각하지 않으며 칸트가 뭔가 지금 중요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고 탓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것은 칸트라는 위대한 개성, 인격에 대한 주위의 따뜻한배력이지만, 실은 이 칸트에 대한 배려 이상으로 가정에서도부모는 자식들에게 따뜻하고 조심스런 보호를 해주지 않으면안 된다.

예를 들면 아이들이 뭣인가 열중하고 있을 때 정해진 취침시간이 되었다고 하여 억지로 아이들을 잠자리로 쫓아 버리는 것은 생각할 문제다.비록 밤마다 그런 일이 계속된다고하더라도 아이들은 조정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이튿날 등교에 지장을 가져오고 지각을 거듭하게 되고 하면 자기 자신의

고기 집이나 집착을 스스로 고치게 된다.

아이들에게 취침은 어른보다는 중요한 생활속의 필요사항이고, 아이들은 졸음에 대해서도 어른보다 저항력이 약하다.그런데도 아이들이 잠을 잊고 무엇에 열중하고 있다면 그것은 싫증나기 쉬운 아이들로는 큰 경이에 말려 들고 있는 것이다.텔레비전만은 예외라고 하겠지만, 비록 그것이 만화라 .하더라도 지나치게 말릴 일이 아니다.그 때의 아이들의 눈빛을 옆에서 살펴서 그들의 주의(注意)의 정도를 고려해 아야 한다.

취침 전에 한해서가 아니라 부모가 무슨 심부름을 시키거나, 그가 해야 할 일이 있으면서도 다른 일에 열중하고 있을 때에 부모는 그 아이의 집중을 방해하지 않도록 신중히 고려해야 할 일이다.

아이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단거리 선수와 같다.집중을 하는 대로 놓아 두면 어른에 비하여 짧은 시간에 그것을 소화시켜 버리게 된다.그것을 일일이 시간을 이유로 타박하고, 브레이크를 거는 일은 아이들의 내면적인 발육을 저해하기 쉽다.

오히려 현대에는 사물에 열중하고 골똘하는 아이들이 줄어가고 있다.부모가 바라지 않는 일에 대해서도 아이들이 중하고 골똘하고 있을 때 부모로서는 평소에 잘 파악하지 못하던 아이들의 성격, 개성을 아이들과 그 대상과의 관련 속에서 인식을 다시 해야 한다.

흥미나 호기심 없이는 아이들은 사물에 열중할 수 없고, 그리고 고상한 학문도 또한 흥미나 호기심에서 발을 들여 놓게 된 것이 가장 뿌리깊고 큰 성과를 올리게 된다.

아이들 방은 지저분해도 신경쓰지 말라

부모들은 무조건 자녀에게 정돈을 요구하고, 아이들은 무조건 그 주의를 어긴다.과장해서 말하면 부모 자식 사이의상극(相剋)은 여기에 있다.그러나 잘 정돈된 아이들의 방이란 하나도 매력이 없다.

입이 딱 벌어지도록 지저분한 아이들의 방을 바라볼 때 나는 아이들의 끝없는 파괴와 창조의 에네르기를 느낀다.어질러도 좋지만 뒷처리 만은 제손으로 말끔하게 해 놓으라는 부도가 있다.이것 또한 잘 생각해 보면, 부모의 허영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으나 부모의 자기네 위주에 지나지 않는다.어질러 놓은 방과 정돈된 방의 어느 쪽이 보기 좋게 느껴지는지는 부모와 자식 사이에는 자연 그 보는 점이 다를 것이다.

아이들은 제 방이 아무리 어질러져 있어도 그들로서 귀한손님을 맞이한 때는 그들 나름의 방법으로 제 방을 정돈한다.정돈한다기보다는 손님을 맞이하여 놀이에 필요한 공간만은게 손으로 만들어 낸다.

그리그 철이 들어서 어질러진 자기 방이 웬지 미안한 느낌이 들고 다른 허영심에 자극을 받으면 아이들은 제 방을 이번에는 부모가 놀라서 어리둥절할 정도의 집착을 가지고 치우고 닦아 내는 법이다.예컨대 애인을 가지게 된 아들은 부

모가 말하지 않더라도 그 상대가 올 때쯤 되면 자기 방을 말끔히 치워 놓는다.

아이들은 자기 방을 자기가 바라는 대로 관리함으로써 자기의 제계관을 갖게 되는 것이다.아이들이 방이 없을 때에는 그들의 책상을 그들 방이라고치고 그들의 성()으로 생각하면 된다.

자기 방이나 자기 책상에 대한 성주로서의 책임감은 결코 부도가 기대하는 것처럼 정돈한다는 사실로써 발휘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부모는 깨달아야 한다.

즉 방이나 책상이 그의 마음에 들고 기분에 맞으면 그만인 것이지 부모들의 눈으로 보아 형편없이 어질러진 상태라 해도 관여할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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