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내 충고를 지켜 그 업계에서 탁월한 업적을 올리고있다는 것을 3년쯤 지나서 그의 부친으로부터 고맙다는 말과함께 들을 수가 있었다.사나이의 발언이란 모름지기 능력과책임에 의하여 뒷받침이 되어 있어야 한다.자기와 관계가없는, 혹은 자기의 능력을 벗어난 사항에 관해서는 천 마디,만 마디의 말을 지껄여 봤자 그것은 의견이랄 것도 못되는,한낱 허황된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의 인격과 도량(度量)을 측정할 수 있는 것은 결국 말을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나이가 무엇을 얼마만큼 할 할
철수 있느냐 하는 것을 척도로 삼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아이들에게 가르쳐 주지 않으면 안 된다.
태평양 전쟁의 이야기를 해주라
인간이 하는 짓이란 그다지 선한 것이 못된다고 하는 인식(認識)을 전제로 생각한다면, 그리고 또 그러한 인식을 가지고 역사를 냉철하게 바라보면 우리 사회의 장래라는 것도 평화의 기대나 이상이 그대로 현실화될 만큼 안심할 수 있는것이 못된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전쟁을 바라는 자는 없으리라.그러나 인간의 역사를들이켜보면, 인간의 진보라고 하는 것이 거의 전부가 크게는 전쟁, 작게는 개인 대 개인의 다툼에 의하여 이룩되어 온것을 부정할 수가 없다.
내가 좋아하는 에피소드는, 캬롤 리이드의 유명한 영화『제3의 사나이』 속에 나오는 한 장면이다.오오슨 웰즈가분강한 제3의 사나이가 황폐한 윈의 폐허를 내려다보며, 친구이기도 한 아메리카에서 찾아온 값싼 인도주의를 신봉하는각가에게 이렇게 읊조린다.「보게, 그래도 인간은 움직이고있지 않나.평화, 평화, 평화라구? 볼져 가(家)의 전제 (專制)는 빛나는 르네상스를 가져 왔지만 스위스의 평화가 이룩해놓는 것은 뭐야? 구구구 하고 우는 비들기 시계 뿐이 아닌가」라고.거기에는 인간의 업보를 파악한 냉엄한 진리가 담겨있다.
예컨대 오늘날 우리 사회를 돌이켜볼 때, 오늘의 융성 발전은 우리 나라가 저 무모하고도 옳지 못한 전쟁이라고 보는태평양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더라면 결코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어떤 전쟁이 옳았느냐, 옳지 못하였느냐 하는 판단은 역사관의 차이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아주 공평하게 보아도거기에는 상대적으로 두 가지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오늘날 거리에서 목적 없이 소란을 피우는 폭력 학생들의 다수는태평양전쟁을 부정하고, 태평양전쟁에서 잃은 생명의 댓가로우리들에게 오늘의 자유를 누리게 해 준 선인(先人)들의 뜻까지도 부정한다.
그것은 경솔하고 얄팍한 하나의 반동이라면 반동이랄 수있다.그럼 이러한 사려의 부족 속에서 그들이 돌이켜보려고도 하지 않는 태평양 전쟁이 시사 (示) 하는 교훈과 진리를외면한다는 것은 사회적으로나 민족적으로 큰 손실이 아닐수 없다.
이쯤 국 · 중·고등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편파적인 역사관에 의한 교육은 우리의 가장 큰 교훈적인 체험을 매우 일
적인 가치판단에 의해서 아이들에게 왜곡하여 가르치고 있다.이러한 왜곡을 시정하기 위해서도 비록 아무리 사소한일일지라도, 예컨대 공습의 체험 하나만이라도 부모는 자식에게 자신이 몸소 겪은 전쟁이야기를 들려 줄 의무가 있다.
그것은 그 전쟁을 겪으며 여기까지 성장해 온 사회에 살고,있는 사회인으로서, 동시에 많은 다툼에 의하여 성장하는 불가사의한 업보를 지닌 한 인간으로서의 채무이기도 하다.
바보들의 턱없는 한가지 재주가 그저.그 속에서 드디어 전쟁을 비롯하여 인간이 할 수 모든 폭력이 마치 사악(邪惡) 인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어 버렸다.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인간의 진보나 비싸움 속에서 나온다.그것을 단순히 폭력이라는 사실만 부정해 버린다면 그 싸움 속에서 비로소 얻어지는 인간 확립이라는 것까지도 잃어버리게 된다.들자면, 길을 지나가다 어떤 사람이 별안간 자기 얼침을 뱉았다고 하자.우리는 그때 상대를 때려눕히지 마음이 풀리지 않는다.말로만 힐책하고 상대가 손으로 씻어드리겠다고 나선 데도 화는 남는다.늘날과 같이 평화니 설득이니 하는 헛된 명분의 시대의 서는 인간 개인의 존엄이 태연하게 상처를 입는 수가 개인의 존엄이나 자유는 어디까지나 개인의 육체적 능발로로서의 폭력을 구사하여 지키지 않으면 안되는 경 많은 것이다.저명인사라는 부류는 저명인이기 때문에 무엇이고 참내지 않을 수 없는 곤란한 지경에 놓여 있다.나 또한은 이름이 알려진 인간의 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러한 피
해를 가끔 입게 되는데, 그런 경우 나는 누가 뭐래도 상대에지 폭력으로 보답하기로 하고 있다.
어느날 거리에서 나에게 실례되는 말을 걸어온 대학생을 나무라며 한 대 갈겨주었더니 상대는 일행이 많았는 데도 말로만 「폭력을 쓰지 마시오!」라고 해서 오히려 내가 놀랐다.
어렸을 때 나는 반장의 직권으로 약간 지나치게 동급생들을 단속했다.그 보복으로 길목을 지키던 7.8명의 동급생들한테 얻어맞은 일이 있었다.마침 같은 길로 돌아오던 아스가 손을 쓰지 못한 채 나혼자 울면서 맞고 있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었다.나는 코피를 흘리면서 집으로 돌아왔는데, 내골을 보고 구중을 하는 어머니에게 나는 먼저, 동생이 형제이면서도 하나도 도와 주지 않고 보고만 있었다고 말했다.
조금 뒤에 계면쩍은 얼굴로 돌아온 아우를 어머니는 아무달도 없이 냅다 주먹으로 몇 대 쥐어박았다.
오늘날에 와서는 싸움에는 동생이 나보다 훨씬 강하다.나는 등생 때문에 그의 싸움에 말려들어 공연한 싸움을 몇 차례나 벌였다.그때 이후 우리 형제는 하나가 싸우면 언제나 형제가 같이 나서서 싸우기로 했던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선 도덕도, 언어도, 정신도, 이념도 모두 장식품에 지나지 않는다.어떤 계기에서 그것이 모두 벗겨져 나가버린다면 우리를 최후로 지켜 주는 것은 육체 밖에 없다.스스로의 육체적 존재를 주장하는 방법은 개인의 폭력이다.그 폭력은 그밖의 여러 가지 폭력과는 다르며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엄성이 있다는 진리를 아이들에게 가르치지 않으면 안 된다.
정당한 까닭도 없이 얻어맞고도 반격할 수 없는 아이는 그의 인생의 싸움판에서도 별 일이 없는 아이가 된 것이다.